북한 이탈주민 강 씨, 남한에서 18년


탈북보다 정착이, 정착보다 육아가 더 어려워





강지혜 씨(가명)는 2003년 12월 남한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고향인 함경북도를 떠나 강을 건넌지 4년 만이다. 고향을 떠나 무산, 중국 흑룡강성, 산동성 위해를 거치며 기나긴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이었지만, 도착이 끝은 아니었다. ‘정착’이라는 거대한 산이 강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남한 행 결정


지혜 씨는 중국에서는 평생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분증이 가짜니까,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잖아요. 평생 살 수 있는 뿌리가 없었어요. 근데 한국 가면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내 이름으로 된 신분증도 받을 수 있고, 집도 준다고 하고, 국적을 준다니까 당당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남한 행을 선택할 때는 잘 살거라는 포부가 있었다.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사회에서 내가 노력만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남한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았다.


남한 도착 후 직면한 ‘낯섦’


3개월간의 하나원 교육 후 배정받은 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 문을 열고 나오면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낯선 기분, 혼자 어딘가에 뚝 떨어진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가 없어요.” 안정적인 삶을 기대하고 왔지만, 기대와 달리 너무 낯설었다. 합법적인 지위를 취득했지만, 여전히 불안정했다. 당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일단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당시 화장품 가게에 취직했는데, 이력서에 북에서 왔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강원도 고성이 북한과 말투가 가장 비슷하다고 해서 고성고등학교 졸업, 개인 사정상 중국 4년 거주라고 이력서를 작성했다. 당당하게 ‘진짜 나’로 살기 위해 남한행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속여야 했다.


화장품 가게에서 일을 하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 은 강 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한 중국인 손님으로부터 우연히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손님이 “너만큼 중국어를 잘 하는 사람을 나는 한국에서 처음 봤다”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동안으 자신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잘살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대학 중국학과로 진학을 선택한다.


대학 진학과 정체성 찾아가기


대학 생활은 어땠냐는 질문에 “대학에서의 생활은 낯설었어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같은 20대를 만나 좋기도 했지만, 문화 차이가 너무 심했어요. 예를 들어 친구들이 말하는 가수, 아이돌 당연히 하나도 못 알아들었죠. 친구들한테 바로 북에서 왔다고 오픈하지 못하고 계속 흉내를 냈었어요.” 대학이라는 공간은 스스로 끊임없이 소개하는 곳이었는데 그게 싫었다고 한다. 시작은 평등하게 하고 싶었고, 깊어지면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이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고, 스스로도 힘들었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신뢰가 쌓이고 확신이 생겼다.


“2학년 때쯤 이야기했는데, 처음에는 안 믿다가 나중에는 ‘똑같네” 이러더라고요. 1년에서 1년 반 동안 나를 봐왔던 친구들이었고. 그냥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뭐 그래도 강지혜는 강지혜니까” 이런 식의 반응이었고, 애들이 크게 궁금한 게 없는지 별로 묻지도 않더라고요.”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원했던 삶의 모습을 성취하는 순간이었다. 4학년 때 취업 스터디를 하면서 처음으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오픈을 했는데 반응이 긍정적이었고, 예상하고는 달라 놀랐다. 점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당당하게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결혼 그리고 시부모와 관계 맺기


졸업 후 취직을 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뿌리를 박기 위해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 배우자는 건강한 부모 밑에서 자란 건실한 남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이 잘 모르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서 그런 기준을 정했다. 그리고 포장되어 있지 않은 진짜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시부모와 관계를 맺는 것은 큰 관문이었다.


“결혼 3년 후 시어머니와 크게 갈등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말끝마다 “문화가 달라서”라고 하는 말투가 있었거든요. 제가 관계에 있어서 다른 것은 다 감내하는데, 차별적 언어와 시선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감지되는 순간 저돌적으로 직면합니다…” 강 씨는 다른 것은 감내해낼 수 있는데 그 지점은 이혼 사유도 가능하고, 그런 차별을 안 받기 위해서,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그걸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을 위해서도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시어머니께 이야기 했어요.”


두 번 못할 육아


자신이 해본 것 중에 육아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농담 섞인 어조로 “탈북은 두 번 해도 육아는 두 번 못하겠어요. 그래서 한 명만 키웁니다.”라고 했다. 첫 번째로 이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 자신 없게 만들었다. 아이를 키우는데 이 사회가 가는 방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내가 이 사회에서 자라지 않아 사회 분위기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지금 와서는 그 답이 없다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유는 그 사회의 '룰'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어요.” 그렇지만 자신만의 육아와 교육에 대한 철학과 방식을 찾았다.


두 번째로 친정의 부재가 육아에 있어서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한국사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친정은 큰 조력자이다. 그렇게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존재가 없다는 것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기대고 싶은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누군가 밥 한 끼 해줬으면 좋겠다. 그 정도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담백하게 진술했는데, 육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는 감정적 동요를 조금 보였다. 과거의 경험과 감정은 세세하게 잘 기억나지 않고, 그때의 상처들은 많이 극복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육아는 현재 당면해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다가온 것이라 추측한다.


‘성공적 정착’ 평범한 일상


강 씨는 자신이 목표했던 바를 다 이루었고, 스스로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강 씨는 인터뷰 중간에 “제가 거기 사람인지 여기 사람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라는 말을 했다. 강 씨는 이미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조재희 대구 북한이주민 지원센터(하나센터) 소장은 정착의 의미에 대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 내 배경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성공적인 정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차별과 차이를 스스로 잘 개념화하신 분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해 살더라고요. 그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건 자신이 겪은 일을 객관화 하는 사람이에요.”


강지혜 씨는 ‘성공적 정착’이라 할 수 있다. 차별과 차이에 대해 개념화를 잘 했고, 자신의 경험을 잘 객관화 한 사람이다. 차별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하게 알아차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오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고향을 떠난 것에 대해 후회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사회에서 살았다면 나의 개별성이나, 내가 가지고 태어난 기질적인 부분을 더 모르지 않았을까. 상대적으로 남한은 북한 사회보다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라서…만족합니다. 다시 돌아가라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강 씨는 계속해서 자신을 알아가고 싶어 하고, 따라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잘 알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남한이 자신의 그런 욕구를 잘 발현할 수 있는 사회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원했던 만큼”은 아니라고 서술한다. 강 씨의 서술을 통해 한국사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취재, 글=최성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