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2021년, 미디어 속의 여성서사
연대와 화합, 그리고 새로운 화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 속 '여성 서사' 콘텐츠가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간 주류적 서사에서 배제되어 왔던 목소리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2021년은 예능과 웹툰, 드라마 등 모든 미디어 콘텐츠에서 여성과 퀴어를 중심으로 한 서사가 빛을 발한 한 해였다.
올 한 해 동안 수많은 여성 서사 콘텐츠가 등장하고 화제로 떠올랐다. 그중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와 드라마 <마인>, 웹툰 <정년이>는 남다른 화제성을 보였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나온 'Hey mama 안무 챌린지'는 틱톡에서 3억 뷰(view)가 넘었고, 드라마 <마인>은 최종화 시청률 10.5%를 기록하며 지상파를 포함 전 채널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웹툰 <정년이>의 경우, 페미니즘에 반하는 세력의 '별점 테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9점대의 높은 별점을 유지하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의 서사에 대중들이 공감과 관심을 쏟고 있는 추세이다.
■ 기존 경쟁 구도 탈피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그간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경쟁 구도를 강조하는 기획과 편집을 자행해왔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도 역시 참가 댄서들이 경연을 통해 더 높은 점수를 받아서 우승을 차지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스트릿 우먼 파이터> 참가 댄서들은 경쟁 구도 속에서도 전문적인 실력은 물론, 자신의 가치관과 예술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고, 그런 참가 댄서 사이에는 자연스레 경쟁심이 아닌 존경과 응원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댄서'라는 정체성을 꾸준히 고민해온 이들의 진심 어린 모습이 견고했던 경쟁 구도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을 단번에 무너트린 것이다.

참가 크루 라치카는 “여기에 있는 모든 여자들을 응원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비욘세의 'Run The World' 곡에 모든 팀의 깃발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지목 배틀' 무대에서는 워스트 댄서가 아닌 존경하는 댄서를 선택해 춤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댄스 결과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참가 댄서 '립제이'와 '피넛'의 배틀 무대에서 승패와 상관없이, 공연 후 존경의 표시로 신발을 던지는 댄서 문화를 다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생방송 파이널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탈락한 크루의 리더들까지 무대를 함께 구성하고 서로를 축하해주는 모습을 통해 참가 댄서들의 화합을 보여주었다.
■ 성별이분법과 성역할 넘어서는 웹툰 <정년이>
웹툰 <정년이>는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국극단 속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여성국극이라는 분야 자체가 가부장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성격을 갖지만, 다양한 여성 인물들을 담아낸 <정년이>는 더욱 깊은 내용을 담아냈다.

<정년이> 속 여성국극 배우들은 복식과 말투 등으로 남역을 연기하면서, 성별 이분법에 갇히지 않은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중 주목할 점은 <정년이>에서는 남성으로 '패싱(passing)'되는 고사장과 남역 연기를 연구하는 정년이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극 중 고사장은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에 부당함을 느끼고 남성 복식을 하는 인물이며,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을 전달해 줌으로써 정년이가 남성 배역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작품 속에서 고사장은 “고작 어깨를 떡 벌리고 목소리를 깔았을 뿐인데 말이야. 남자됨과 여자됨이 참 가소로워.”라고 말한다. 또 <정년이>에서는 “청의왕자는 왜 공주가 됩니까? 왕자끼리는 혼인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청의공주는 왜 왕비가 됩니까?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으니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정년이> 작가 '나몬'은 2020년 6월 여성신문에서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여성국극이 성행하고 외면받았던 때보다 훨씬 더 다양성이 중요시되고 화두에 오르고 있다.”고 말하며, 작품의 의도를 설명했다. 꾸준히 기존 사회의 성별이분법과 성역할에 의문을 던진 <정년이>는 웹툰 작품 최초로 '2020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 콘텐츠 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드라마 <마인>, 편견에 맞서는 여성서사의 힘

드라마 <마인>은 '상속을 둘러싼 재벌가의 권력 다툼'이라는 뻔한 주제에 계모, 미혼모, 레즈비언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 등장인물을 출연시키며 새로운 서사를 써간 작품이다. 특히 등장인물들은 고정된 정체성에서만 멈추지 않고, 친모 이혜진과 양모 서희수가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연대하고 공동양육을 선택하거나 아내 정서현이 남편에게 커밍아웃하는 장면을 연출하며 작품을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특히 커밍아웃한 아내에게 지지를 표하는 남편의 대사는 단순히 동성‘애愛’가 아닌 성소수자와 앨라이(지지자)로 그려진 인물들의 관계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그동안 재벌가의 상속이 혈연과 남성에 치우쳤다면, 재벌가 며느리로 등장하는 정서현은 성 정체성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인물 자체로 인정받으며 전통적 부계 사회에 대한 전복을 나타내기도 한다. 극의 인물들은 서로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미혼모 후원재단을 운영하거나 재능있는 장애인 예술가와 협업 전시를 기획하는 등 소수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인> 백미경 작가는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하여 우리의 불행을 만드는 것 중 가장 큰 하나가 편견이라고 지적하며 그런 상황에 더 쉽게 놓이는 여성들을 통해 편견에 맞서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에 방연주 대중문화평론가는 《PD 저널》 칼럼을 통해 “두 여성이 그럴듯한 정상성에 반기를 들고, 그들을 둘러싼 편견에 맞서고, 끝내 자신만의 선택에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점이 <마인>의 관전 포인트”라고 호평했다.
연대와 화합으로 뭉친 여성서사는 한발 더 나아가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통해 오랫동안 고착된 정상성의 틀을 깨는 힘을 가진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여성 댄서의 전문성과 주제성을 통해 기존 경쟁 구도를 존중과 응원의 관계로 전복했다. 웹툰 <정년이>는 성별 이분법적 사고를 뒤집고 젠더적 수행을 유동적으로 표현했다. 드라마 <마인>은 단편적인 정체성에서 그치지 않고 각 등장인물이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틀을 부수는 세 작품을 통해 여성서사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고, 여성 서사 콘텐츠가 나아갈 방향성과 역할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껏 배제되었던 목소리를 조명하는 것은 소수자를 벗삼는 과정뿐만 아니라 미디어 속 더 많은 화자를 불러모으는 작업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미디어 속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취재, 글=박에스더 박예은 최성주 허지원 기자